대구의 보수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현대의 대표적인 보수 도시, 대구...그러나, 원래 대구는 진보도시였다.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에 제일 먼저 저항했고, 1956년 총선에서 이승만에 대항해 진보 후보 조봉암을 70%나 찍은 곳이 경상북도지역이다.(영호남 37.5%, 대구, 경산, 칠곡은 70%이상 득표)
대구는 4·19혁명 당시에도 제일 먼저 거리로 뛰어나간 도시였고, 1960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2월 28일, 야당의 선거강연회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도 등교를 하라고 하자 대구 고등학생들이 조직적 시위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71년 총선에서도 대구시민들은 다시 한 번 대구가 ‘야당도시’, ‘민주도시’임을 보여줬다. 나아가 통혁당, 인혁당 등 1960-70년대 혁신세력들도 대구가 중심이었고,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된 전태일도 대구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는 인혁당사건으로 인한 공안정국으로 보다 철저히 보수화가 진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음이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 이승만의 사법살인
조봉암의 희생(1960년 2월 28일)에 다른 어느 곳보다, '이승만정권 타도'를 외치며 목숨을 걸었던게 대구사람들이다.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선거를 앞두고,민주당 후보였던 장면 박사의 유세일에 못나가도록 일요일임에도 중간고사 등을 이유로 등교지시를 내리게 되면서, 60년 2월 27일 경북고등학교 이대우 학생부 위원장집에 모여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학교 사범대 부설고, 대구상업고등학교, 대구 농림고등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이 모여 시위를 조직했고, 결의문도 채택한다. (이것이 '2.28 대구학생의거'이다)
2월 28일 고등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에서 경상북도청으로 향하며, 세력은 1200여명으로 커졌고, '장면'박사를 보고 '만세'를 외쳤다.
경북도지사는 '이놈들은 모두 공산당'이라며, 경찰들을 동원해 구타를 감행했고, 120여명을 체포하고, 일부 주동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을 석방한다.
2월 28일 12시 55분,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이 조회단에서 외친 결의문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릴 학도요, 조국을 괴뢰가 짓밟으려 하면 조국의 수호신으로 가 버릴 학도이다.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위하여 싸우련다.
이 '2.28대구학생의거'는 고교생들이 주체가 된 조직시위로 민족운동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으로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박정희의 사법살인
이를 알려면 박정희 정권의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사건을 알아야 한다.
61년 5.16군사쿠테다이후 박정희는 서독, 일본 등에 자금수혈을 통해 경제재건을 하려한다. 62년 김종필을 일본과 만나는 과정이 굴욕적이라고 해서 6.3시위(한일 굴욕외교반대) 등이 일어나며 정권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위기를 탈출하고자, 박정희는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은 도예종, 양춘우, 김단부, 배재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등 41명을 4.19시기에 활동했던 통일운동가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용공집단으로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는 조직으로 조작하여 기소하고자 한 것이 '제 1차 인민혁명당 사건'(1차 인혁당사건)이다.
이때 공안부 검사 3인(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이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불가와 사표제출하였으나, 검사장은 정명래검사로 하여 기소케하여 국회본회의까지 논란이 된 사건이다. 그중 구속기소된 26명의 피고인들은 물고문, 전기고문 등 심한 고문을 받은 것이 폭로되면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검찰은 26명중 14명을 공소취하하고 석방하고, 12명과 추가구속한 양춘우 등 13명에 대해 '만공법'위반으로 변경하여 재판하였고, 도예종, 양춘우 2명을 제외한 11명에게 무죄선고를 한다.
이게 검찰(검찰총장 신직수)이 불복하여 항소하여 판결을 뒤집고, 이 13명에게 징역1년에서 3년을 확정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미국 닉슨대통령의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인 ‘3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1971년부터 3연임을 시작하였고,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였다. 마침내 유신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이 조치에 위반한 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 하였다.
1974년 4월 3일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1차 인혁당사건) 사건 관련자를 다시 처벌하기 위한 것으로,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이 된 '신직수'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면서,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6명이 대구경북출신) 등 8인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려 항소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고, 1975년 4월 8일 사형판결을 확정하고, 4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사형을 집행한다. 사형집행에 걸린 시간은 6분, 선고하고 18시간 만의 사형이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국제법학자협회)(2차 인혁당사건)
이들의 구명을 의해 노력했던 씨노트 신부와 오글목사(인혁당 사건의 진실밝히려고 헌신) 는 심지어 강제추방당하게 된다.
이 8명중 6명이 대구경북사람으로서, 억울한 사법살인 이후에 이들의 친척, 친구 등 관련된 지인들을 연좌제로 몰고, 경제적 핍박과 이들의 동태를 주민들로 하여금 신고하게 만든다.(8명의 시신탈취, 직장퇴출, 월급 통장 동결, 아들들의 학교에서의 괴롭힘, 어머니식당테러 등)
그들과 그들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탄압과 경제적 압박, 취업불가 등 공포분위기의 조성을 통해 대구사람들은 '자기검열'을 위해 보수화(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빨갱이를 욕하고 도외시해야한다)가 진행되며, 대구경북의 민주화는 사장되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대구 경북의 보수화는 시작되었다고 봐야한다.
이후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효상이 한국 최초의 지역주의 선거 전략인 ‘경상도대통령론’과 경상도 위주의 중공업기업의 활성화와 1980년 광주학살 등을 거치며 지역주의가 보다 강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이 1985년 선거까지는 대구도 지역주의로 투표하지 않고 진보쪽을 밀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87년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분열해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치러졌어야 할 선거가 ‘지역대결구도’로 변했고, 노태우 진영 등 대선후보들이 지역주의 전략을 공공연하게 펼치면서 지역주의가 전면화되어 대구 출신인 노태우를 지지하게 되면서 그 첨예함의 보수화는 굳건해 진다.
즉, 대구가 보수화되어 보수정당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주의에 의해 지역정당을 지지하게 되었고,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를 반대하던 대구와 경북은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지역으로 변모해갔다. 즉, 이는 '지역주의의 부수적 효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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