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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홍범도, 박정희 누가 더 빨갱이일까?

by 자로소 2023.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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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과 박정희 전 대통령, 누가 더 빨갱이일까? 뉴라이트역사관의 시대인가?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사진출처 : 경향신문

 

홍범도장관의 공산당 가입이력(국방부에서 문제 삼고 있는 이력)

1. 국방부의 입장 

<8월 25일, 이종섭 국방부장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흉상 철거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것”
<8월 26일, 국방부 입장>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여러 논란이 있는 분을 육사생도의 상징적인 건물인 중앙현관에서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됐다”며 육사에 설치된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등 독립운동가 5명의 흉상을 철거·이전하겠다고 발표. 
1921년 6월 발생한 자유시 참변사태 이후 홍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점도 문제이고, 22년 극동민족대회에서 레닌으로부터 권총 선물을 받았고, 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30년대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는 점이 문제이다. 

용산구 국방부 청사앞, 용산구 전쟁기념관, 노원구 육사에 세워져 있는 홍범도 흉상, 사진출처 :한겨레

 

2. 홍범도 장군의 이력

홍범도 장군(1868년 8월~1943년 10월)
평양에서 가난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포수 생활을 하다 늦은 나이인 구한말 의병에 참여했다. 홍 장군은 1920년 간도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뒀다.  1937년 소련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이주해 말년에는 현지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 1943년 순국했다. 
1927년(당시 59세), 소련 공산당(볼세비키당)에 입당했으나, 해방되기 전 1943년 사망하였고, 이는 이후 북한 공산당 정권 수립이나 6 ·25 전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러일 전쟁 중에,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소련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은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대표하기 위해 일본의 적국인 러시아를 이용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거나 활용한 독립운동가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가담했다는 기록은 아예 없다. 
 

3.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대 정권의 예우

- 박정희 정부 :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 추서
- 노태우 정부 : 1990년 한국-소련이 수교했을 때  홍 장군 유해 국내 봉환을 시도
- 박근헤 정부 :  2016년 3월에는 7번째 1800t급 해군 잠수함(1800t급)의 이름을 ‘홍범도함’으로 명명
- 문재인 정부 : 2018년  '홍범도함' 실전 배치, 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홍장군 유해를 봉환받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대한민국장 수여
  

박정희대통령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조직책 이력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38년, 21세의 나이로,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 지원했으나, 나이문제로 탈락한다. 동료였던 유증선 선생의 조언으로 박정희는 면도칼로 손가락을 벤 후, '혈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1939년 3월, 그의 혈서는 만주신문에 실렸고, 그 신문 기사를 본 그의 고향 선배이자 조선인 출신의 만주군 대위 강재호가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1939년 3월 31일, '혈서 군관지원-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만주신문, 왼쪽인물이 박정희

그해 10월 군관선발시험에서 240명의 합격자 중 15등의 성적으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입학하였고, 1942년 '타카기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금장시계와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게 되어 본과에 진학하고, 1944년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 후 그는 수습군관이 되어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되고, 1945년 7월, 황군 육군 소위로 '만주군 제6 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의 소대장으로 활약한다. 1944년 12월, 작전참모 역학을 하고, 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45년 8월, '둬룬'으로 진출하여 소련군 진격을 막다가 일본의 패망소식을 듣고,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다. 

이후, 박정희는 신현주, 이주일과 함께 북경으로 가, 한국광복군 제3 지대장 김학규의 제1대대 제2 중대장에 임명되었고, 1946년 4월 평진대가 해산되자,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에 귀국한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 3개월 단기과정을 밟은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포병 소위계급을 부여받는다. 
이때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는 공산주의자로 대구 10.1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에게 사살당하였다.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은 박정희 가족과 매우 가깝게 지내왔으며, 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끌어들였다.
박정희는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국가 전복 기도사건을 지도한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한 가장 큰 규모의 사건이다.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의 주도하에 숙군 작업이 진행되면서 박정희는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연계되어 체포되었다. 박정희는 군 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제공하며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고, 이를 통해 사형판결을 피했으며, 무기징역선고에서 2심에서는 징역10년으로 감형받는다. 이때 만주육군군관학교 출신인 백선엽과 김창룡의 도움으로 처벌을 면하고, 다시 군대에 복귀한다. 
 

홍범도장군 흉상 이전계획의 핵심으로 떠오른 나종남교수는?

1. 나종남 교수의 프로필 

1970년생으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군사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역사학과 박사, 서강대 사학과 석사
한국현대사학회(뉴라이트 계열) 창립준비위원(2011년)
박근혜 당시, 국정교과서의 '현대사' 집필진 중 한 명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 집필진
홍범도 흉상 기념물의 재배치위원회 실무 총괄자

나종남

2. 나종남의 논란, 대표적 글

2014년 SNS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립군 토벌 사실이 100% 날조됐다", "자유라는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가지고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결 론 

이들의 이런 의식 속에는, 뉴라이트역사관이 뿌리하고 있다. 
뉴라이트는 89년~90년대에 시작된 역사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의 역사관은 '인간이란 주어진 조건에서 사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 선택을 하는 존재'라고 전제한다. 즉, 그들은 시장경제의 확대와 발전이 곧 역사발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유물론에 가까운 물질주의는 '이익극대화가 인간 본성이고, 그것을 위해 자유롭게 거래하고 교환할 수 있게 만드는 시장이 역사발전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제강점기에 주어진 조건에서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일본에 협력하고, 자본주의적(금융, 경영, 노동) 실행자들은 역사발전의 주체가 되고, 독립운동가들은 테러, 파괴한 사람들이 되어 시장질서를 해친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역사발전의 주체가 되면 안 된다는 논리이다. 

뉴라이트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현 정권의 인사들이, 이승만 국부론과 1948년 건국절 논란에 이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라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지우려 하고 있다.  몇 년 후에는 김구안중근윤봉길김좌진, 홍범도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과 경술 8적은 조선을 근대화시킨 선각자로 둔갑할 수 있다.  저들에 의해서 3.1절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들의 데모일 것이고 유관순은 반정부시위자라는 오명을 얹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식이기에 친일파의 친일역사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독립운동가들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며, 역사를 지체시킨 사람들로 인식한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의 수탈은 '수출'이라고 하고, 종군위안부나 징용노동자들의 강제 동원은 '자발적 취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일본의 시장에 대한 폭압적 개입 같은 경우를 자본논리로 보며,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역사발전과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행동으로 본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배우고 순응한 사람들의 지식과 노하우 덕분에 남한은 북한보다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북한은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했기에 중세봉건적 상태에 머물러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뉴라이트사관에서보면, 독립운동가들은 시장질서를 교란시킨 자들이기에 숭배하면 안 되는 것이고, 거기에 순응했던 사람들만이 존경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민족주의는 없다. 또한 이들의 역사관은 지극히 물질주의를 넘어 물질숭배적 사고방식이기에 거꾸로 반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태도이다.
이는 최근의 묻지 마 칼부림사고라든가,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를 먹는다든가, 이태원참사를 보고 시체팔이 한다든가 하는 등 인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인간적 측면이 많이 결여된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자유주의 또는 극단적 물질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뿐 아니라, 그게 더 정당하고 올바른 태도라고 본다는 점이다. 


이런 역사관을 확대하기 위해 뉴라이트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과정이라든가, 교학사 교과서 등을 만드는 일을 해왔고, 독립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이고, 친일파의 공장과 학교 세우기는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논리를 집요하게 확대하려 한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 흉상 외에 이회영(초대 부통령의 친형), 지청천(초대 무임소장관), 이범석(초대 국무총리), 김좌진(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함) 까지 , 공산주의와 무관한 분들을 이전 철거를 하려 했다는 것은 이런 독립운동을 자본론적 역사발전을 저해한 인간들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관련 기관에서 독립운동,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를 지운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헌법 위반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논리가 맞지 않는 것은 '좌파경력은 어떤 이유로도 안되고, 친일은 된다'는 이중성과 모순성 앞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흉상건립을 검토하고 있는 백선엽장군은 6·25 전란시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전멸 전과가 크지만, 일제의 간도특설대 복무사실은 잊었단 말인가(이로 인해 백선엽은 이명박정부에서 '친일행위자'로 규정한 바 있으나, 윤정권의 국가보훈부는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기록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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